구직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린 A씨는 '급여대행사 팀장'을 자칭한 인물로부터 퇴직금·월급 정산 서류를 전달하는 아르바이트를 제안받았다. A씨가 실제로 맡은 일은 보이스피싱 피해자에게서 현금을 받아오는 것이었고, 그렇게 피해자 8명에게서 9차례에 걸쳐 1억6900만 원을 수거했다. 1심은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지만, 2심은 범죄의 고의가 없었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대법원은 지난해 6월 이 판결을 다시 뒤집었다. 신원 확인 절차 없이 채용된 점, 피해자에게 건넨 '공문서'가 매우 조악했던 점, 보이스피싱 수법이 오래전부터 널리 알려진 점 등을 근거로 "보이스피싱 범행에 가담함을 알았거나 미필적으로나마 인식했다"며 무죄 판결을 파기했다. '아르바이트인 줄 알았다'는 해명만으로는 형사책임을 벗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범행을 총책·콜센터·인출책·수거책·전달책 등으로 나눠 운영한다. 국내에서 돈을 직접 받아 옮길 인력은 구직사이트나 SNS, 텔레그램 등에 '고액 단기 아르바이트', '단순 심부름'으로 위장한 공고를 올려 모집한다. 최근에는 현금 수거뿐 아니라 통장·체크카드 대여, 상품권 구매, 가상자산 전송, 해외 취업을 미끼로 한 모집까지 수법이 다양해졌고, 외국인 유학생이나 이주노동자가 연루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인출책·수거책 사건의 핵심 쟁점은 '미필적 고의'다. 보이스피싱은 여러 사람이 역할을 나눠 맡는 구조여서, 가담자가 전체 범행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아야만 공범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공범과 순차적·암묵적으로 의사가 통해 피해자의 돈을 수거한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만으로도 사기죄의 공동정범이 될 수 있다. 수사기관과 법원은 모집 경위, 보수 수준, 업무 지시 방식, 연락 수단, 가명 사용, 현금 거래 여부 등을 종합해 보통의 성인이라면 의심했을 상황이었는지를 따진다.
반대로 고의가 부정된 사례도 있다. 범행 당시 만 18세로 사회 경험이 없었고, 7차례 현금을 수거한 대가로 13만 원을 받은 수거책에 대해 법원은 재무설계 회사의 단순 사무보조 업무로 믿었을 여지가 크다고 보고 무죄를 선고했으며, 2024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같은 수거책이라도 모집 경위와 보수 수준, 업무 지시 방식, 연락 수단, 전달 횟수 등 구체적인 사정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
인출책·수거책은 방조범이 아닌 사기죄의 공동정범으로 처벌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12월 형법 개정으로 사기죄의 법정형은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서 20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높아졌다. 이득액이 5억 원 이상이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이, 통장이나 체크카드를 넘겼다면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이, 범죄수익을 옮기거나 숨기는 데 관여했다면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이 함께 적용될 수 있고, 대가로 받은 돈은 추징 대상이 된다. 최근 부산지법은 주식 투자 전문가를 사칭한 투자사기 조직(피해자 34명, 피해액 약 20억5,000만 원)의 인출책 4명을 모집하고 조직원을 차량으로 실어 나른 40대에게 징역 1년 8개월과 추징금 380만 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범행의 성격을 충분히 인식한 상태에서 가담해 가담 정도가 가볍지 않고, 피해 회복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양형 이유로 들었다. 피해자의 돈을 직접 가로채지 않은 하위 가담자라도 실형이 선고될 수 있다는 의미다.
수사기관의 가담자 추적도 강화되고 있다. 지난해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1조2,578억 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보이스피싱 정부합동수사단은 출범 후 약 4년간 1,381명을 입건해 526명을 구속 기소했다. 수사는 중계기와 대포통장, 자금세탁 조직까지 범행 단계별로 이뤄지고 있지만, 총책은 해외에 머무는 경우가 많아 실제 검거되는 이들은 국내에서 돈을 만진 하위 가담자인 경우가 많다.
경찰 조사를 앞두고 있다면 혐의를 무조건 부인하기보다 사실관계를 정리하는 일이 먼저다. 구인 공고와 메신저 대화, 계좌 거래 내역, 업무 지시 내용 등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를 확보하고, 어떤 경위로 일을 시작해 무엇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시간 순서대로 정리해야 한다. 초기 진술이 객관적 자료와 어긋나면 진술 전체의 신빙성이 흔들려, 이후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처벌 수위를 좌우하는 양형 요소도 있다. 범행임을 인식한 뒤 곧바로 중단하거나 신고했는지, 가담 기간과 역할이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 범행을 주도했는지 등이 고려된다. 피해자와의 합의나 공탁 등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도 유리한 사정으로 참작될 수 있다.
조직적 사기 사건에서 가담자의 고의는 진술보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수사기관은 메신저 대화 기록과 계좌 흐름, 통화 내역, CCTV와 이동 동선을 맞춰 가담자가 언제부터 범행을 의심할 수 있었는지를 재구성한다. 같은 수거책이라도 처음부터 범행을 알았다고 볼 자료가 있는지, 중간에 의심할 계기가 있었는지에 따라 다툴 쟁점이 달라진다. 혐의 자체를 다퉈야 할 부분과 양형에서 소명해야 할 부분은 사건마다 다르고, 이를 당사자 혼자 가려내기는 쉽지 않다. 수사 초기부터 수사기관의 판단 방식을 잘 아는 변호인과 함께 자료를 검토하고 진술 방향을 정해야, 혐의를 다툴 여지와 선처를 구할 근거를 모두 놓치지 않을 수 있다.
도움말 : 법률사무소 새율 강민기 대표변호사
출처 : 경북신문